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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고구려 쇠퇴와 북부여 멸망

 

1장 고구려의 중국과 전투 패배

 

발기의 반란과 첫 번째 환도성의 몰락 – 현재 개평 지역의 피해

기원후 197년,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으나 후계자가 없었다.

왕후 우씨는 좌가려의 난 이후로 정치에서 물러나 대궐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왕이 죽자 정치 무대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애통함보다 기쁨으로 가득 찬 그녀는 국상을 숨긴 채 왕의 큰아우 발기를 은밀히 찾아가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씨는 발기에게 "왕위 계승자가 없으니 그대가 그 자리를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유혹했지만, 발기는 환도성과 요동 지역 전체를 관할하며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고추가로서 그녀의 속셈을 경계했다. 그는 단호하게 "왕위는 하늘의 명에 따른 것이며, 부인이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또한 밤중에 이런 일을 논하는 것은 왕후답지 않은 행동입니다"라고 꾸짖었다. 이에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 우씨는 곧바로 왕의 둘째 동생 연우를 찾아갔다. 그녀는 왕의 죽음과 발기를 찾아갔다가 핀잔을 들은 일을 낱낱이 고하고 연우와 결속하였다. 연우 역시 크게 기뻐하며 우씨와 함께 밤 연회를 즐겼고, 손가락을 다친 연우를 위해 그녀가 치마끈을 잘라 묶어주는 모습까지 보였다. 다음 날 국상 사실을 발표하며, 조작된 유조를 내세워 연우를 왕위에 올렸다.

발기는 연우가 왕위에 올랐음을 듣고 격분하여 격문을 띄웠으며, 연우와 우씨의 부정을 폭로하며 군사를 일으켜 왕궁을 공격했다. 그러나 사흘간의 전투 끝에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발기는 패배했고, 3만 명의 순나 주민과 요동 전역을 이끌고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항복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공손도는 한나라 말기의 야심가로, 190년에 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요동태수로 자청하며 독립적인 통치를 꿈꾸던 인물이었다. 요동 지역은 당시 고구려 차대왕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발기의 항복으로 그는 이를 차지할 기회를 얻었다. 공손도는 3만 명의 정예 병력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했고, 고구려의 중심지인 첫 번째 환도성을 불태운 뒤 비류강으로 진격해 졸본성을 공격했다.

이에 연우왕은 계수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반격에 나섰고, 한군을 크게 격파하며 좌원까지 털어냈다. 이 과정에서 발기는 계수와 마주했으며, "네가 어찌 형제를 죽이겠느냐? 의롭지 않은 연우를 위해 형을 죽이려 하는가?"라며 매달렸다. 계수는 이에 "연우가 비록 다소 부정하더라도, 너처럼 나라를 팔아버리고 외세를 끌어들인 자보다는 더 낫다"고 응수했다. 이에 발기는 깊은 수치심에 빠져 비류강에서 자결했다. 그러나 그가 나라를 팔아넘긴 요동 지역은 회복되지 못했고 공손도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후 공손도는 스스로 요동왕이라 칭하며 요동 지역을 요동, 요중, 요서로 나누고 동래 지역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연우왕은 수도를 현재 환인현 혼강 상류인 안고성으로 옮기며 제2환도성을 건설했다.

 

동천왕의 제1차 환도성 회복과 오·위와의 외교

연우왕은 형수 우씨의 손을 빌려 왕위에 올랐으며,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그러나 우씨의 나이가 많음을 못마땅히 여겨, 주통촌에 사는 아름다운 처녀 후녀와 몰래 혼인하여 소후로 삼고, 후에 동천왕을 낳았다.

기원후 227년에 연우왕이 세상을 떠나고, 동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은 네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첫째, 위나라는 조씨 가문이 다스리며 지금의 하북성 업현을 중심으로 양자강 이북 지역을 차지했고, 둘째, 오는 손씨 가문이 지금의 강소성 남경에 수도를 두고 양자강 이남을 통치했다. 셋째, 촉은 유씨 가문이 성도를 수도로 정하고 지금의 사천성을 지배했다. 마지막으로 요동에는 공손씨 가문이 세력을 잡아 양평을 근거지로 난하 동쪽과 요동반도를 장악했다.

고구려는 공손씨와 적대 관계에 있었으며, 촉과는 거리가 멀어 교류가 어려웠다. 또한 위와 오 두 나라와도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그런데 기원후 233년에 요동의 공손도의 손자인 공손연이 위와 오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으로, 오의 황제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이 신하임을 자처하고 위를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허미를 대표로 수천 명의 군사를 보내 공손연에게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이를 이용해 허미를 위와 교섭하는 미끼로 삼으려 했고, 허미와 그의 부하인 진단 등 약 60명을 붙잡아 현도군, 즉 지금의 봉천성에 가둬 처형하려 했다. 그러자 진단 등이 탈출해 고구려로 도망쳐 거짓말을 퍼뜨렸다. 진단은, “오 황제 손권이 고구려 왕에게 바친 공물이 적지 않았고, 고구려와 동맹해 공손연을 공격하고 땅을 나누자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큰 풍랑으로 인해 바닷길을 잃고 요동 해안에 도착했는데, 공손연 측에게 발각되어 공물과 문서를 모두 빼앗기고 체포되었습니다. 다행히 틈을 타 도망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라고 꾸며 말했다.

동천왕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진단 등을 접견했다. 그리고 조의 25명을 선발해 진단 일행을 바닷길로 호송하도록 했다. 또한 초피 1천 장과 갈계피 10장을 손권에게 선물로 보내며, 고구려 육군과 오의 수군이 협력해 공손연을 토벌하자는 조약을 제안했다.

그 이듬해(234년) 손권은 사굉과 진굉 등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에 많은 선물과 보물을 바쳤다. 이에 동천왕도 착자와 대고 등을 사절로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착자가 오나라에 도착한 후, 오의 실정을 보고 사실과 다른 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오의 수군이 약해 공손연을 바닷길로 공격할 능력이 없었으면서도 큰소리만 쳐 고구려의 선물만 노린 점, 둘째, 손권이 고구려를 대외적으로 존중하는 척했지만 국내에서는 고구려를 정복한 것처럼 선전하며 백성을 속였다는 점이었다. 착자가 귀국 후 이 사실을 보고하자, 동천왕은 크게 분노하며, 위제(魏帝) 조(曹)에게 밀사를 보내 고구려와 위가 오나라와 요동에 대해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할 경우 위는 육군으로 고구려를 돕고, 위가 오를 공격할 경우 고구려는 예(濊)의 수군으로 위를 지원한다는 협약이었다. 두 나라가 이렇게 협력하여 이미지를 제거한 후에는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는 위가 점령하기로 했다. 이듬해에는 오의 사신 호위(胡衛)가 고구려를 방문했는데, 동천왕은 그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으며, 이후 고구려와 위 두 나라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다.

237년, 동천왕은 신가 명림어수와 일치 착자, 대고 등에게 군사 수만 명을 이끌게 하여 양수(梁水)로 진격시켜 공손연을 공격했다. 이에 대응하여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母丘險)에게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요수(遼水)로 나가게 했다. 공손연은 곽흔(郭昕)과 유포(柳蒲) 등을 보내 고구려를 막고, 비연(卑衍)과 양조(楊祚) 등을 보내 위를 방어하도록 했다. 하지만 곧 위군이 패배하며 물러났고, 공손연은 자신을 연왕(燕王)이라 칭하며 천자의 위의를 표방하면서 고구려에 전력을 다해 맞섰다.

이듬해, 위는 태위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군사 10만 명을 동원하였다. 사마의는 먼저 관구검으로 하여금 요대(遼隊)를 공격하며 공손연의 수비병 비연과 양조 등을 상대하게 했다. 동시에, 자신은 은밀히 북으로 진격하여 공손연의 수도 양평을 기습적으로 포위했다.

당시 공손연의 정예군 대부분은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양수로 진출해 있어 양평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비연 등이 돌아와 구원하려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30여 일간 포위를 당한 공손연은 굶주림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처형되었다. 공손씨는 3대에 걸쳐 50년 동안 요동을 지배해왔으나 결국 멸망하였다. 위나라가 이렇게 공손씨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삼국지 동이열전(東夷列傳)은 이를 언급하며 태위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고구려 군이 수천 명을 이끌고 와 협력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위나라 공식 역사서인 명제본기(明帝本紀)와 공손도전(公孫度傳)에서는 이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는 중국의 역사 기록 방식에서 '국내 일은 상세히, 외국 관련 사항은 간략히' 기술하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한편, 고구려 본기에도 사마의를 '사마선왕'이라 칭하며 이를 돕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삼국지에서는 수천 명으로 기록된 고구려의 군사가 여기서는 천 명으로 축소된 것이 의문점을 남긴다.

위나라가 공손연을 완전히 제거하고 요동 전역을 점령한 이후, 그들은 고구려와 체결했던 동맹을 배반하고 요동의 어떤 지역도 고구려에 반환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동천왕은 자주 군사를 일으켜 위를 공격했고, 결국 서안평(西安平)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전사에서 현재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곳으로 설명되곤 하나, 공손연 시절에는 양수 부근에서 바닷길로 연결된 요충지로 보인다. 이는 당시 지명이 빈번하게 이동되었음을 보여준다. 


관구검의 침입과 제2의 환도(丸都, 지금의 안고성) 함락

기원후 245년경, 위나라는 고구려 동천왕의 빈번한 침입을 우려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해 수만 명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에 동천왕은 비류수에서 적을 맞아 싸웠고, 관구검의 군대를 크게 무찔러 약 3천 명을 참수한 뒤, 양맥곡까지 추격하여 다시 3천 명을 살상하였다. 이 승리에 대해 동천왕은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우리 적은 병력만 못하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왕은 여러 장수를 후방에 대기시키고 5천 명의 철기 부대를 직접 이끌며 공격을 이어갔으나, 관구검이 고구려 군사의 열세를 간파하고 결사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급격히 전진하자 고구려 군대는 퇴각했고, 그로 인해 후방 병력까지 혼란에 빠져 참패를 당하며 1만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희생되었다.

패배 후, 동천왕은 약 천여 기병과 함께 압록원으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이를 추격하며 현재의 안고성으로 알려진 환도까지 진격해 대궐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역대 문헌을 약탈해 위나라로 보냈다. 이후 장군 왕기에게 동천왕 추격을 맡겼다. 동천왕은 죽령으로 도망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흩어지고, 오직 동부의 밀우만이 왕 곁을 지켰다. 상황이 매우 급박해지자 밀우는 결사적으로 싸움을 벌였고, 그 틈에 동천왕은 산악 지대로 도주하며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더 험난한 지형을 기반으로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 왕은 밀우를 구출해 오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했고, 결국 남부의 유옥구가 적진으로 가서 밀우를 구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왕은 자신의 넓적다리살을 베어내 밀우에게 먹여 그를 회생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위군의 추격은 계속되었고, 이번에는 북부의 유유가 나섰다. 유유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급한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식량을 가지고 적군에게 접근, 거짓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는 위나라 장수와 만난 자리에서 음식 그릇에 감춘 칼로 장수를 제거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군은 반격의 기회를 잡아 위군을 격퇴하고 요동 낙랑 지역까지 몰아냈다.유유는 음식 그릇 속에 감춰 두었던 칼을 꺼내어 위의 장수를 찔러 죽였다. 왕이 군사를 동원해 위의 군대를 반격하자, 위의 군대는 무너져 재정비하지 못하고 요동의 낙랑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와 관련된 기록은 김부식이 삼국지와 《고기(古記)》를 혼합해 《고구려본기》에 적었기 때문에, 내용의 앞뒤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1) “관구검이 1만 명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했다”는 내용과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는 서술에서는, 고구려가 위보다 두 배 많은 병력을 가졌다. 그런데도 이후 동천왕의 발언에 “위의 많은 군사도 우리의 적은 병사만 못하다”고 실려 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2) 또한 비류수에서 위의 군사 3천 명을 살상하고, 양맥곡에서 다시 3천여 명을 처단해 총 6천여 명의 위병을 잡았다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되면 위군은 이미 절반 이상의 병사를 잃어 더 이상 병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기록에는 “왕이 철기(鐵騎) 5천으로 추격하다가 크게 패했다”라고 기술되어 있어, 앞서와는 모순된다. 

또한 관구검에 대한 전투 결과를 보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받은 사람이 백 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는 출정한 군사의 숫자와 전투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지만, 1만 명에 그쳤다는 인식은 다소 어색하다. 이러한 혼란은 중국 측 기록이 내부 사건은 상세히 적으면서 외부 사건은 간략히 축소하는 경향(상내약외詳內略外)을 유지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기록은 여기서 멈춘 것 같다.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이 전쟁은 동천왕 20년(서기 245년)에 발생했다고 한다. 동천왕 20년은 중국 위나라 폐제 방(芳)의 정시(正始) 8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삼국지 관구검전에서는 “정시 중 현도로부터 군대를 내어 고구려를 치고, 정시 6년에 다시 정벌했다”고 적혀 있다. 
이에 《해동역사》는 이를 정시 5년과 정시 6년 두 번의 전쟁으로 나누어 기록했는데, 정시 5년과 6년은 각각 동천왕 18년과 19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삼국지 본기에는 정시 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고 기술되어 고구려본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어느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까?

1905년 청나라 집안현(輯安縣)의 한 지방관이 집안현 판석령(板石嶺)의 고개에서 발견한 관구검의 기공비(記功碑) 파편에서 ‘6년 5월’이라는 글귀가 둘째 줄에 확인됐다. 만약 이 유적이 진품이라면, 전투는 정시 6년, 즉 동천왕 19년에 시작되었고, "다시 싸웠다"는 기록은 오류로 보인다. 그러나 청나라 시기의 인사들이 고대 유물을 위조하는 사례가 많아, 이 비석 조각 또한 진위 여부를 아는 데 고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설령 이것이 진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불내성(不耐城)의 비문이며 환도성의 의 기록은 아니다. 왜냐하면 집안현의 환도성은 세 번째 환도성이고, 이 성은 동천왕 때 아직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제2장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환도성(丸都城)의 파괴 후 평양으로의 천도

제2의 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은 서북쪽으로의 대규모 정복 의지가 꺾여 결국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로써 고구려는 처음으로 남쪽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고구려의 대세에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남낙랑에 속했던 소규모 국가들은 이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으면서도 과거 대주류왕이 최씨 세력을 멸망시켰던 원한으로 인해 복종과 배반을 반복했다. 그러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가 되어 왕궁과 군대의 중심이 이곳으로 이동하자, 이들 소국은 압도되어 점차 완전히 굴복하게 되었다. 둘째,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주로 서북쪽으로 확장하며 흉노나 중국 세력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천도 이후에는 백제, 신라, 가야 등 남쪽 세력과 자주 접촉하게 되어 북방보다는 남방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서북 중심의 나라에서 동남 중심의 나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를 이끈 주요 요인은 평양 천도였다. 그러나 이 천도의 직접적인 배경은 제2환도성의 파괴였으므로, 제2환도성의 파괴는 고대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제 2 장 고구려 대 선비족 전쟁


선비 모용씨의 강성

선비족은 고구려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비록 단석괴의 용맹이 알려졌으나 고구려의 명림답부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인해 요동을 상실하고 국세가 약화되자, 선비족은 고구려를 배신하고 한나라에 붙었다. 뒤이어 한나라 말기에 원소와 조조가 대립하던 시기에 선비와 오환은 원소를 지지했으나, 원소가 몰락하자 조조는 기원 207년 7월 장마를 틈타 노룡새 500리를 은밀히 넘어, 선비와 오환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의 근거지를 파괴하였다. 이로 인해 오환은 멸망했고, 선비는 이후 가비능이라는 지도자가 등장하며 다시 세력을 강화했으나, 한나라 유주 자사 왕웅이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기원후 250년경 선비족은 우문씨, 모용씨, 단씨, 척발씨 네 부족으로 분열되어 서로 경쟁하였다. 이 가운데 모용씨 부족에서 뛰어난 용맹과 꾀를 가진 모용외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였다. 그는 창려 태극성(현 동몽고 지역의 특묵우익 부근)을 근거지로 삼아 사방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진나라(사마씨)가 위·오·촉 세 나라를 통일하였으나, 모용외에 패배하며 요서 지역의 혼란이 지속되었다. 역사가들 중에는 모용씨가 자리 잡은 창려를 현재의 난주 부근으로 보는 이들이 있으나, 진서 무제 본기에 기록된 “모용외가 여창을 침략했다”는 내용을 고려하면 진나라의 창려와는 다른 지역임이 명백하다. 이는 후일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수도로 삼았던 용성과 가까운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북부여의 파괴와 의려왕의 자살

북부여는 제3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 여러 나라의 문화적 원천이 되었던 국가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 시절 이후로 압록강 이북 지역이 상실되면서, 북부여를 조선의 영역 밖의 나라로 여기게 되었고 그 역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해모수왕 이후 북부여의 정치 및 사회적 변동과 흥망성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일부 정치적 관계의 단편들이 전해져, 대강이나마 그 흐름을 유추할 수 있다.

후한 안제의 영초 5년(서기 112년), 당시 부여왕(이름은 미상)이 보병과 기병 약 7,000~8,000명을 이끌고 한나라의 낙랑군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역사상 북부여가 외국에 군사적 활동을 펼친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연광 원년(서기 121년)에는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 한나라와 함께 고구려, 마한(백제), 예, 읍루 등을 공격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듬해 한나라가 고구려 차대왕에게 화의를 요청하며 비단을 배상으로 보낸 기록을 보면 북부여와 한나라가 고구려를 격파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서기 136년, 위구태가 왕위에 올라 약 2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한나라의 현도군을 습격했다. 이후 공손도가 요동왕이 되면서 북부여의 강성함을 두려워해 자신의 종실 딸을 위구태왕에게 시집보내고 고구려와 선비에 대한 공수동맹을 맺었다. 위구태왕은 고구려 차대왕처럼 무예를 숭상하는 강한 군주로 평가되며, 그의 치세 기간은 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로 여겨진다.

위구태 이후 간위거왕에 이르러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마여가 즉위했다. 그러나 오가 중 우가가 반란을 도모했고, 우가의 형의 아들이 이를 충성으로 저지하며 민심을 얻었다. 결국 우가 측이 모반했으나 위거가 이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처형한 뒤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마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어린 아들 의려(당시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위거가 그를 보좌했다.

위거가 사망하고 의려왕이 독자적으로 통치한 지 41년 만에 국방이 허술해졌고, 이를 틈타 선비족의 모용외가 북부여를 공격해 수도 아사달까지 침입했다. 의려왕은 방어 능력이 부족함을 인지하고 결국 자결하며 백성들에게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를 사죄했다. 그는 유서를 통해 왕위를 태자 의라에게 넘기며, 나라를 재건할 것을 당부했다. 의려왕은 방어 실패라는 과오가 있었더라도 항복 대신 자결을 선택하며 죽음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해 조선 역사상 첫 순국 왕으로 남았다. 이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굴욕적인 절충안을 택한 군주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의로운 결단이었다.

그 후 의라가 목숨을 부지하며 서갈사나(현재의 개원 부근의 숲)로 도망쳐 결사대를 조직, 선비족 군대를 몰아내고 험준한 지역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여 재건을 시작했다. 아사달은 단군 왕검 이래 수천 년간 번영했던 고도였으며, 진귀한 보물과 풍부한 문헌들—신지의 역사 기록과 이두문으로 기록된 풍월 등—이 넘쳐났던 곳이다. 또한 단군 왕검의 태자인 부루가 중국 하우에게 전수했다는 금간옥첩에 적힌 글들도 존재했으나, 모두 선비족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고구려의 예란(濊亂) 토평(討平)과 명장 달가(達賈)의 참사

기원후 280년, 선비가 북부여에 침입하기 6년 전, 고구려에서는 예(濊)의 반란이 일어났다. 예는 본래 수렵시대의 야만 부족으로, 초기에는 북부여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북부여가 과중한 조세를 부과하자 이에 반발하여 고구려로 귀속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국력이 쇠약해지자 다시 고구려에 반란을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고 무수히 많은 백성을 살해하며 가축들을 약탈했다.

서천왕은 이 사태를 심히 우려하며 뛰어난 장수를 찾아 나섰고, 여러 신하들은 왕의 아우인 달가를 추천했다. 달가는 기발한 계략을 세워 예의 본거지를 급습했고, 그 과정에서 추장을 포함한 6~7백 가구를 포로로 삼아 부여 남쪽의 오천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주변 여러 부락의 항복을 받아내어 혼란을 수습했다. 이에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책봉했다.

그 후 서천왕이 서거하고 그의 아들 봉상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봉상왕은 천성적으로 남을 시기하고 의심이 많아, 숙부이자 위대한 명성을 전국에 떨친 달가를 질시했다. 결국 그는 달가를 억지 죄목으로 몰아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말했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예맥의 난에 오래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모용외의 패퇴와 봉상왕의 교만과 포학

모용외는 한 시기를 풍미한 걸출한 영웅이었다. 진나라의 정사가 부패하고 중국이 머지않아 혼란에 빠질 것을 예감한 그는, 결국 전 중국을 손에 넣겠다는 야망을 품는다. 그러나 동쪽의 고구려를 제압하지 못하면 뒷날의 걱정거리가 될 것을 잘 알았던 모용외는 북부여를 격파한 기세를 이어 곧바로 고구려를 침공하려 했지만, 당시 안국군의 명성을 두려워해 주춤거리며 때를 보았다. 그러던 중 안국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서기 292년에 정예병을 이끌고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침범하였다.

당시 봉상왕은 신성 지방을 순행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안 모용외는 신성을 포위해 맹렬히 공격하며 점차 상황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에 신성의 성주인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가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모용외의 군대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며 왕을 구출해냈다. 봉상왕은 이를 크게 기뻐하며 고노자의 작위를 올리고 북부대형(北部大兄)으로 임명하였다.

이듬해인 293년, 모용외는 또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졸본(卒本)으로 진입하며 서천왕의 무덤까지 파헤치려 했으나 구원병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봉상왕은 모용씨의 계속된 침공에 대해 우려하며 고민에 빠졌고, 이에 '신가' 창조리가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북부대형이자 신성의 성주인 고노자는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인재입니다. 대왕께서 이미 고노자를 두고 계시니 어찌 선비족의 위협을 걱정하십니까?” 그러면서 그는 왕에게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임명하도록 권하였다.

고노자는 백성을 사랑하고 병력을 잘 훈련시켜 여러 차례 모용외의 침략을 물리치며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후로도 모용외의 군대는 더 이상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봉상왕은 이에 자만하여 점차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흉작이 이어져 백성이 굶주리고 국력이 피폐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왕은 대규모의 궁궐 건설에 집착하며 전국에서 인부를 징발하였다. 이로 인해 국민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국가 인구는 점차 감소하는 위기에 처했다.

서기 300년에 이르러 봉상왕은 여러 신하들의 간언마저 외면한 채, 나라 안의 열다섯 살 이상 되는 모든 남녀를 무리하게 동원하여 궁궐 공사에 투입하였다. 그러자 '신가' 창조리가 왕에게 다시 간언하였다. “연이어 닥친 자연재해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백성들은 피폐하여 남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는 굶주림 속에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이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이처럼 고된 토목 공사를 강행하고 계십니다. 이는 임금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북쪽에는 강적 모용씨가 호시탐탐 우리의 틈을 노리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부디 깊이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는 것이 잘못이요, 신하가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충이 아닙니다. 제가 '신가'라는 자리에 있는 이상, 결코 묵과할 수 없어 이렇게 아룁니다.”

그러나 봉상왕은 이를 듣고 노하여 답하였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보는 존재이니, 임금이 거하는 대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다면 백성들이 무엇으로 경외심을 품겠소? 신가는 백성을 위해 명예를 구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덧붙여, "죽음을 피하고자 한다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을 것을 깨닫고 동지들과 비밀리에 의논한 끝에 왕을 폐위시켰다.


봉상왕의 폐위와 미천왕의 즉위

봉상왕은 처음에 숙부 달가를 죽였고, 이어 동생 돌고를 의심해 죽였다. 그런데 돌고의 아들 을불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예감하고 도망쳤다. 봉상왕은 이후 여러 차례 을불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을불은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숨겨 도망 다녔으며, 수실촌의 음뢰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음뢰는 을불에게 가혹하게 노동을 시켰는데,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집 앞 늪지의 개구리를 조용히 시키려고 돌을 던지게 하여 집안이 평온히 잘 수 있도록 했다. 견디다 못한 을불은 1년 만에 그곳을 탈출해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소금을 들여와 강동 사수촌의 한 집에 소금짐을 내려두었다. 그 집의 노파가 공짜로 소금을 달라고 요구해 을불은 한 말가량 주었으나 노파는 만족하지 않고 더 내놓으라고 졸라댔다. 을불이 거절하자 노파는 오히려 앙심을 품고 몰래 소금짐 안에 신발 한 켤레를 숨긴 뒤, 을불이 떠나자마자 쫓아가 소금짐에서 신발을 꺼내며 두 사람을 절도죄로 고소했다. 결국 을불은 태형을 맞고 소금은 노파에게 몰수당했다. 이 사건 이후 소금장사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그는 머슴살이조차 하지 못한 채 여러 마을을 떠돌며 걸식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의 옷은 너덜너덜 해졌고 얼굴은 너무 초췌하여 그 누구도 그가 왕족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즈음 북부의 '살이' 조불과 동부의 '살이' 소우 등이 봉상왕의 무도함에 불만을 품고 왕위를 폐위시키려는 논의를 하며, 새로운 왕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로 을불을 지목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을불을 찾아 나섰다. 결국 비류수에서 을불을 만나 그의 신분을 확인했는데, 특히 소우가 어린 시절의 을불을 알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소우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조용히 전했다. "현 임금이 무도하여 우리가 뜻을 모아 새 왕으로 당신을 세우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어 "현 임금이 민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라 모든 신하들이 왕손께서 나라를 이끌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품행과 덕망이 남다르신 왕손께서 조상의 업을 이어 주십시오"라며 그를 설득했다.

그들은 을불을 설득하여 창조리의 동료 조맥남의 집에 은신시켰다. 가을 9월, 창조리는 봉상왕과 함께 후산으로 사냥을 나섰다. 이때 창조리는 갈대잎 하나를 따서 갓에 꽂으며 말했다.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은 갈대잎을 갓에 꽂으시오." 이에 모두가 갈대잎을 꽂으며 창조리의 뜻에 호응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연합해 봉상왕을 폐위하고 별실에 가두었다.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봉상왕은 자식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을불은 왕위에 올라 미천왕(美川王)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미천왕의 요동전승과 선비 몰아냄

기원후 197년 발기의 반란 이후부터 기원후 370년경 고국원왕 말년까지는 고구려 중엽 시대로 분류되며, 특히 미천왕의 치세는 중쇠 시대 가운데 가장 왕성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저자가 과거 환인현에 머물 당시, 그 지방의 문인 왕자평(본래 만주 사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고구려 고대에 '우굴로'라는 대왕이 있었는데, 그가 왕이 되기 전 불우한 처지에 놓여 곳곳을 떠돌며 걸식했다. 이때 가죽신을 만들어 신었기에 현재 만주에서는 노동자의 신을 '우굴로'라 부르며, 이는 그 대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걸식 중에도 요동을 되찾을 꿈을 품고 산천과 길을 탐험하며 지나던 길의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 풀씨를 뿌렸는데, 지금도 요동 각지 길가에 '우굴로'가 자라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우굴로'라는 이름은 을불과 발음이 비슷하며, 고구려 왕들 가운데 초년에 걸식한 인물은 을불뿐이었으므로 이는 미천왕 을불의 어려웠던 시절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미천왕은 기원후 300년부터 331년까지 약 31년간 고구려를 다스린 왕으로, 그의 통치 기간은 선비족 모용씨와의 혈전으로 점철되어 있다. 간략한 고구려 본기와 과장된 진서 기록을 종합하여 현실에 가까운 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현도 회복  
미천왕 즉위 2년째인 기원후 302년에 현도성을 공격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삼아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이어 즉위 16년째에는 현도성을 완전히 점령하며 요동 지역에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2) 낙랑 회복  
낙랑은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사군 중 하나로, 고구려 동천왕 시기 평양 천도 이후에도 위·진의 태수가 존재한 모순적인 역사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천왕은 재위 14년째인 기원후 313년에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차지했다. 당시 진나라의 장통은 모용씨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백성 천 가구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항복했다. 이후 낙랑 지역은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3) 요동 전승  
요동 중심지는 양평(현 요양)이다. 진서에는 미천왕이 요동 공격에서 패하며 맹약을 청했다고 기록되었으나, 양서에서는 을불이 요동을 지속적으로 공격했고 모용외가 이를 제어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진서를 왜곡한 것으로 의심되므로, 양서 기록이 보다 신뢰할 만하다. 현도와 낙랑을 이미 정복한 상태에서 요동도 곧 고구려의 손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 구체적 증거는 부족하다.

4) 극성 전쟁  
기원후 320년에 고구려 미천왕은 선비족 우문씨와 단씨, 그리고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와 연합해 모용외의 수도 극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모용외가 네 세력 간의 이간질을 하자 미천왕과 단씨는 퇴각했고, 우문씨와 최비가 모용외와 싸움을 벌였지만 큰 패배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최비는 고구려로 투항했다. 또한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하성에서 항거하다가 모용외의 장수 장통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진서에 전해져 사실로 보인다.

다만 여노자는 고노자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고노자는 모용외를 여러 차례 격파한 명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봉상왕 5년 이후 본기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시점 이후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약 40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은 더욱 의구심이 든다. 이는 거짓된 기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3  환도(丸都) -  집안현(輯安縣)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의 함락

기원후 331년, 미천왕이 세상을 떠나고 고국원왕(쇠)이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332년에는 모용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모용황이 후계로 즉위하였다. 고국원왕은 미천왕보다 더 큰 야망을 지녔으나 통치 능력에서는 미치지 못했고, 모용황은 아버지 모용외를 뛰어넘는 야심과 전략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형제 모용한과 두 아들인 모용준, 모용각은 모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고국원왕은 평양에 있던 도읍(서울)이 서북부 경영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오늘날 중국 지린성 집안현 근처 홍석정자산 위에 새로운 환도성을 축조하고 도읍을 옮겼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세 번째 환도성으로, 태조왕 시대 왕자 수성이 건설한 첫 번째 환도성은 당시 이미 적국의 영역에 있었고, 동천왕 시대 구축된 두 번째 환도성은 적국과 너무 가까워 방어가 용이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국원왕은 전투에 유리하고 방어가 쉬운 지역을 선택해 제3환도성을 짓고 그곳으로 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용황은 고구려가 북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우려하여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한다. 그는 겉으로는 난민처럼 이동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고구려의 방심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타격 계획을 준비했다. 이에 극성 모용한이 제안하기를, “고구려는 우문씨와 달리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니 먼저 고구려를 치는 것이 옳습니다. 공격 경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북도로 직접 환도성으로 향하는 평탄하고 넓은 길이며, 다른 하나는 험하고 좁은 남도로 향하는 길입니다. 고구려가 북도를 더 경계할 것이므로 일부 군사를 북도로 보내 주의를 끌고, 주력군을 남도로 보내 환도성을 공략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용황은 이 전략을 수용하여 계획을 실행했다.

고구려 측에서는 모용황의 군대가 북도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받고 이들의 책략을 간파하지 못한 채, 고국원왕이 5만 병력을 동생 무에게 맡겨 북도를 방어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무는 황의 장수 왕부를 처단하고 적군 1만 5천 명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남도 방어에 나섰던 고국원왕은 소규모 병력으로 대군을 상대하다가 패배했으며, 결국 단기로 퇴각했다. 이에 환도성은 적군에게 함락되었고, 왕태후 주씨와 왕후 모씨가 포로로 잡히는 불운을 맞았다.

환도성을 점령한 모용황은 추가적으로 고국원왕을 추격하려 했으나, 장수 한수의 조언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한수는 “고구려 왕이 패전하여 도망쳤으나, 여러 성의 지원군이 결집하면 우리 대군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국내 산악 지형은 작전에 위험할 소지가 있습니다. 대신 고구려 왕의 아버지 묘를 파헤쳐 유골을 가져가고, 왕태후와 왕후를 포로로 데리고 가면 고구려 왕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항복할 것입니다. 이후 은혜와 신뢰를 내세워 그의 항복을 굳건히 하면 우리의 중원 경영에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환도성의 세 차례에 걸친 천도는 고구려 상고 시기의 흥망성쇠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태조왕 시기, 왕자 수성(훗날의 차대왕)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환도성을 현 개평 부근에 처음 건설했던 시점은 고구려가 가장 번성했던 때였다. 이후, 발기의 반란으로 요동이 공손씨에게 넘어가자 산상왕은 제2환도성을 현재 환인현 부근으로 옮겨 쌓았으나, 이마저도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 의해 파괴될 위기를 맞았다. 이는 고구려가 쇠퇴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미천왕은 선비족을 물리치며 낙랑, 현도, 요동 등 잃었던 영역을 차례로 회복하고 중흥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재위 중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국원왕은 제3환도성을 현재 집안현 부근에 다시 건설했으나, 이는 모용황의 침략으로 또다시 파괴되었다. 이 시기는 고구려가 가장 쇠퇴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삼국사기에는 이와 같은 세부적인 관계가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본기의 기록들을 상세히 검토해 보면 주요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삼국지에서 이이모가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된 것은 사실 제2환도성의 건축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위 기록들은 조선사략과 삼국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된 것이나, 진서에서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폄하하기 위해 많은 허위 기사를 만들어 냈음이 확인된다. 때문에 기록 내용 중 일부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 예컨대, 모용황이 미천왕의 능을 파헤쳤다는 기록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미천왕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고, 그의 사후 12년 후에야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고구려 역대 왕릉은 대개 수도 인근에 위치했기 때문에 미천왕 역시 평양에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환도성을 침략한 모용황이 평양에 묻힌 미천왕의 능을 파헤쳤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왕태후와 왕후를 잡아갔다는 기록 또한 신뢰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가 약 30여 년 동안 중국 대륙에 대한 적극적인 경영을 재개하지 못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모용씨에게 큰 패배를 입고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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